숲을 그리는 일
나에게 숲을 그리는 일이 마치 의무인 것 같았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2016년 2월 겨울의 끝자락에 시작해 다음해인 2017년 11월 가을이 끝 날 때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그 당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두꺼운 3합 한지를 붙인 50호 화판(172×72cm)을 들고 작업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야산의 숲으로 가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마침 나의 이웃집 탁형이란 분이 거의 1년 간 나와 함께 그 일을 함께 해줘서 나는 그와 함께 숲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화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그날의 컨셉에 맞는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숲을 헤매기도 하고 가지고 간 도시락을 먹거나 막걸리나 캔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탁형이 나를 위해 숲에서 모델을 자처한 것이 100번은 될 터이니 그가 나의 숲 그림이 발전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그 숲 시리즈의 주제가 홀로 숲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인간상을 표현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날 그날의 일기를 쓰듯 인물의 포즈를 부탁했다.
추니박_사유의 숲-자작나무_2024
한지에 먹, 아크릴채색
91×73cm
추니박_사유의 숲-자화상_2024
한지에 먹, 아크릴채색
175×130cm
추니박_사유의 숲-지오_2024
한지에 먹, 아크릴채색
175×130cm
추니박_길위의 사색_2024
한지에 먹, 아크릴채색
91×73cm
추니박_길위의 사색2_2024
한지에 먹, 아크릴채색
91×73cm
추니박_사유의 숲-기다림_2024
한지에 먹, 아크릴채색
93×130cm
숲은 인간의 외로움과 슬픔, 나약함과 좌절감을 보듬어주고 용기를 주는 어떤 강인한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다.
처음 숲을 그릴 때는 숲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든 인문학적 관점에서 표현해 보려고 애를 썼고 숲의 진실된 모습을 담아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작업의 양이 많아지고 산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둘은 하나가 되었다.
억지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아도 숲에선 나무와 인물의 모습을 순수하게 그리는 것만으로 이미 내 마음이 투영된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보통 낮에 숲에서 작업을 하고 저녁에 작업실에서 완성 작업을 했는데 더 현장성이 필요한 경우엔 다음날 같은 장소로 가서 보충작업을 했다.
숲을 그리는 일은 많은 시간 관찰이 필요했고 계절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과 가지와 가지의 관계를 이해해야만 했다.
물론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만큼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도 중요했다.
숲에서 작업을 하다보면 온갖 세상사와 지나온 인생의 흔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 때문에 숲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나를 비우는 작업이기도 했다.
수행자의 마음, 치유의 숲과 침묵의 숲
그런 과정을 거쳐 2017년 11월이 되자 130여점의 완성된 숲 작업이 쌓였고 나는 그 시리즈에 '치유의 숲'이라 이름을 붙였다.
치유의 숲은 누군가를 치유하기 위해 그려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치열하고 인내심 있는 작업을 통해 나 자신이 치유되었고
또 사람들에게 그런 힐링의 에너지를 전달해 줄 것이라 기대하는 나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 당시 2년간 현장에서 숲 작업을 하는 동안 온전히 흑백의 수묵으로만 그린 대형 숲 작업을 병행했다.
물기가 빠진 매 마른 겨울 숲과 새싹이 막 피어나는 이른 봄의 적막한 숲에 자화상이 서있는 주제로 숲 작업을 진행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자화상이 있는 숲 주제는 각박한 세상에 홀로 버려진 한 인간이 고뇌와 고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의미로 시리즈의 제목을 '침묵의 숲'으로 붙였다.
침묵의 숲은 나 자신 이외에 어떤 인간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게 쓸쓸하게 묘사되었는데
그것은 원말사대가 중 한명이었던 예찬이 매 마르고 황량한 산수화를 통해 자신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을 이겨내려고 했던 것과 같은 나 자신의 결기가 담겨있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숲에서 보내면서 철저히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어떤 내면의 힘과 나 자신을 내 스스로 품어 줄 작은 공간을 만든 것 같다.
적막한 공간, 그리고 사유의 숲
나의 숲은 따뜻하다. 그러나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과 새소리 바람소리까지 삼켜버린 것 같은 적막함과 고요함을 품고 있다.
내가 의미하는 적막과 고요는 우리가 어떤 일에 집중했을 때 빠져들게 되는 초월적 공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숲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경험했던 블랙홀과 같은 무중력의 진공상태 같은 그런 공간에 존재하는 고요의 숲이다.
공간에서 나는 어떤 슬픔도 아픔도 외로움도 고독함도 두려움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곳은 그저 내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 예술을 통해 내가 이르고자 하는 어떤 절대적 염원이 만들어낸 사유의 공간이다.
나는 그 안에서 완전한 정신적 해방을 느끼고 내가 원했던 정신적 자유를 탐닉한다.
나는 그 고요하고 적막한 숲에 한 사람의 인물(그것은 나이거나 나의 아내이거나 나의 아들과 어머니 등 나의 가족들의 초상)을 그려 넣거나 내가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는 빨간소파를 그려 넣었다.
그 두 개의 오브제는 나를 존재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정신적 역할을 하는 대상들이다.
얼굴이 그려지지 않은 인물과 시간을 잃어버린 숲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는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숲의 주인공들이다.
'사유의 숲'은 치열하게 그리는 육체적 노동을 통해 파생된 정신적, 심리적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숲이다.
그러나 사유의 숲은 우리 모두의 숲이기도 하다.
누구나 상상해 볼 수 있는 완벽한 고요속의 숲, 누구의 간섭도 없이 완전한 자기 자신만의 숲을 우리는 누구나 꿈꿔볼 수 있다.
명상의 상태는 생각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만 끝없는 노력 없이 그 진정한 명상의 공간에 빠져드는 일이 쉽지 않다.
어쩌면 나는 치열하게 그리기라는 화두를 통해 그 명상의 상태에 이르는 나만의 길, 나만의 공간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숲 작업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내가 창조한 숲에서 사람들이 온전히 자신을 치유하고 위로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2024. 5) ■ 추니박